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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한(金斗漢, 서울 종로구 1918년 5월 15일~1972년 11월 21일)은 대한민국정치인·대한학도의용군 참모장· 청년운동가· 사회운동가· 노동운동가이다.

일제강점기약관[1]의 나이로 주먹 황제[2]로 군림하여 민족적·의협적으로 일본식 성명 강요, 황국신민 서사민족말살정책에 반대 거부 등 일제에 저항하였다. 해방 기에서는 잠시동안 조선공산당의 전위대장으로 있었으나 부친(김좌진)의 죽음에 대해 알게 된 후 탈퇴 및 전향하여 우익의 선봉장으로서 반탁운동 등 좌우대립에서 투쟁하였다. 그러나 미군정에서 체포되어 사형을 받기도 했으며 또한 이승만 정부에서도 김구암살 시기에 국가보안법 등 옥고를 치렀다.

한국전쟁에는 대한 학도의용군 등 전선에 참전하였다. 노동운동에도 힘을 기울였다. 대한민국 제3대 국회 · 대한민국 제6대 국회국회의원을 지내면서 이승만 정권, 박정희 정권의 독재에 비판하며 반독재민주화 운동에도 투쟁하였다. 6대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학생들을 선동하여 박정희 정권을 전복하려 했다는 박정희 정권의 정치공작 중 하나인 이른바 한국독립당 내란 음모, 국가보안법 등 혐의로 중앙정보부에서 고초를 겪기도 하였다. 한국 비료주식회사가 사카린을 밀수하여(사카린 밀수사건) 국회에서 삼성 이병철박정희 정권을 비판하며 정일권국무위원 등에게 오물을 투척하였다. (국회오물투척사건) 경기도 수원 신민당 후보로 대한민국 제7대 국회의원 선거 유세에서 북조선의 전깃불 관련 발언이 북조선 찬양했다는 혐의로 반공법으로 옥고를 치렀다.[3] 이후에도 유신 벽보를 뜯는 등 비판해오다 1972년 11월 19일 사람을 만나러 나간다며 나간 뒤 당일에 쓰러져 11월 21일에 사망하였다. 대변에도 능하여 연설 등에서 지지를 받기도 했다.[4]

본관안동, 김상용의 12대손이다. 의송 (義松), 별칭으로는 잇폰 (일본어: いっぽん)이다.

생애 편집

유년기 편집

파일:유년 김두한.JPG

1918년 5월 15일 서울 종로구에서 김좌진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1924년 6세 때 외조모와 함께 만주에서 부친 김좌진과 상봉했으나,[5][6] 당시 봉오동 전투청산리 전투 등 이후 일제의 간도 참변, 그리고 자유시 참변으로 민족진영과 공산주의에 극심한 대립과 일제, 마적 등 좋지 못한 시국으로[7] 김두한은 다시 경성으로 돌아올수밖에 없었다. 이후 경성에 돌아온 김두한은 교동보통학교 (현 교동초등학교)에 잠시 다녔으나 일제감시와 집안의 사정으로 다니지못하였고 개성으로 옮겨 살아가게된다. 1930년 10세 때 개성에서 혼자 경성에 왔으나, 갈곳 없는 김두한은 거지들에게 잡혀 수표교 아래에서 살아가다 원씨 성의 한 노인을 만나 17세까지 성장하였다. "왜놈의 공부는 할 필요가 없다. 곧 독립하니 그 때 공부하라"는 원노인의 뜻에 따라 학교는 다니지않고 운동에만 전념하였다.[8] 한편, 16세 때 조선총독부의해 김좌진의 가족으로서 요시찰인(불령선인)으로 지정되었다.[9]

청년기 편집

파일:1944년, 반도의용정신대 시절.JPG

원노인 마저 죽음 뒤 방황하게 된 김두한은 서울에 주먹들을 눕히며 나이 18세에 우미관[10]을 중심으로 주먹왕으로 군림하였는데 일반적으로 악행을 일삼는 무리가 아닌 상인들을 보호하는 등 일제에 저항하였다. 또 일본의 야쿠자의 하야시와 장충단 공원에서 맞붙기도 하였으며 종로경찰서 마루오카와 맞붙기도 하였다. 또한 일본인들이 우미관 근처 다니기를 꺼릴 정도였다고 한다.[11] 1930년 후반 배우 김승호동양극장의 극단에 추천과 일본군에게 위기에 처한 권투선수 정복수, 레슬링 선수 황병관을 구해주기도 하였다..[12]

태평양 전쟁으로 일제의 조선인 강제징용으로 김두한 또한 비롯해 조선의 주먹패들에게도 징용장이 발부되었는데, 조선 총독부와 협상하여 경성특별지원청년단을 조직하였다. 이후 이 단체는 다시 개편되어 반도의용정신대로 조직되었다.[13]

해방기 편집

해방이 되자 김두한은 건국청년회, 건국치안대, 건국준비위원회 등에 참여하여 일본군 무기고를 점령하거나 치안에 힘을 기울이며 활약하였다. 그러나 곧 미군이 들어오고 미군정 의해 단체들이 해체되자 죽마고우이기도 한 프롤레타리아트 공산주의이던 정진영[14], 만담가 신불출, 박헌영의 인연으로 조선 공산당의 전위대장을 역임했으며 인민군 남조선 사령관 (소장)을 임명하는 제의도 있었다고 한다. 남로당 총책이었던 박갑동에 의하면 김두한이 전위대장으로 역임 한 이후 민족진영에서는 조선 공산당에 대해 공포의 대상이었다고 한다.[15]

이후 임시정부 계열 비밀결사인 백의사, 그리고 이규갑, 장덕수 등에게 김좌진의 죽음에 대해 알게 된 김두한은 조선 공산당을 탈퇴 및 우익으로 전향하였다.[16][17]

김구, 이승만, 김규식 명예회장, 유진산 회장, 그리고 김두한은 감찰부장 겸 별동대 총대장으로 역임하여 대한민청을 조직하고 반탁운동 등 좌우대립에 우익의 선봉장으로서 산정호수 김일성 별장습격, 박헌영 납치미수, 국군준비대 습격, 학병동맹 습격, 전평습격, 심영, 신불출, 김원봉, 여운형, 좌우합작 방해 등 180여 차례 등 활약하였다.[18] 남로당 총책이었던 박갑동에 의하면 박헌영 납치미수와 미군정의 체포령으로 월북하여 남조선의 정책이 바꿨다며 김상룡이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하며 미군정경찰에 잡히면 안심했고 별동대에 잡히면 죽는다며 공포의 대상이었다고 한다.[19]

그러나 좌우합작 방해 이후 경교장에서 김구의 격려와 충고 이후에는 임시정부계열 인물 와는 대립이 없었다고 한다.[20] 이후 계속해서 좌우대립에서 우익의 선봉장으로서 활약하였으며 1947년 대한민청 사건 등으로 미군정 의해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3심 판관이 사퇴제출하는 등 재판 과정에서도 좌-우 대립이 극심하였고, 1948년 3월 21일 김구는 "근일에 김두한 군의 사건을 보아도 우리가 얻는 바 교훈이 많다. 김 군이 자기범행에 대해서 법적 제재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할 수 있으나, 그 범행이 애국적 동기에서 나왔다고 간주할 수 있으며, 또 그가 위대한 애국자 김좌진 장군의 영사(令嗣)라는 점에서 보면, 그에 대한 구명운동이 그토록 열렬하지 못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러면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말하였다.[21] 정부수립 이후 극동사령관의 감형으로 사면되었다.

정부수립 편집

제1공화국 편집

1948년 대한청년단의 감찰국장 겸 건설국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이후 전진한 등과 함께 노동운동에 투신하여 노동운동에도 힘을 기울렸다. 정부수립이후 이승만에게서 국민방위군 사령관 등 요직제의가 왔으나 독재노선에 들어선 이승만에 난색하여 거절하였다. 이후 이승만 정부에 의해 암살표적, 김구의 암살 시기인 1949년 6월 17일 국가보안법 등으로 투옥되어 옥고를 치렀다.[22][23][24]

한국전쟁 편집

한국전쟁이 나자 김두한은 과거 별동대의 대원으로 추정되는 4명에게 극적으로 배를 구해 한강을 건널 수 있었다고 한다. 도움을 준 4명은 한강을 건너 뒤 사라졌다고 하며 누군지는 알수없다고 한다.[25]

이종찬을 만나 수원으로 간 후 인민군과 전투를 벌였다. 김웅수 장군은 회고록에서 "한강 방어선에서의 기억이다. 30일경 김두한 씨의 내방을 받았다. 자기 동료 들에게 총기를 주어 일선 배치를 요구하여 그의 애국심에 감탄하였다." 고 회고하였다.[26][27] 부산으로 내려온 김두한은 포항 전투 영천 전투등에도 참전하였다.[28]

한편. 1950년 8월 17일 북한군은 낙동강을 건너 대구를 공격했지만 국군과 유엔군의 반격으로 물러났다. 그 와중인 8월 18일, 대구에 있던 정부는 부산으로 피난했다. 1960년 제35회 국회에서 부산진 을구 의원 박찬현은 “특무대가 수천 명씩 긴급 구속해서 매일 저녁 수십 대의 트럭에다가 가득 사람을 실어가지고 철사로 모두 묶어 바다에 던져버리거나 해운대, 김해, 양산 등지에서 기관총 등으로 학살했다”고 고발했다. 부산의 비극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박명림에 따르면,“부산에 결집한 상당수 고위층과 부유층 인사들은 배를 부산항에 대놓고 전황이 여의치 않을 경우 일본으로 탈출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이미 일부는 제주도로 피난간 상태였다. 일본으로 밀항은 당시 이른바 돼지몰이로 불렸다. 밀항 주선 비용은 1인당 50만원, 나중에는 100~150만원까지 이르렀다. 밀항을 위한 선박 대절비는 500만원에서 1000만원에 이르렀다. 서울, 대전, 부산에서 도망행렬을 볼 때 이들의 국가수호 의지가 어느 정도였는지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법무장교 태윤기에 따르면 임시 수도 부산의 혹심한 상류사회 비리와 부패는 아예 이곳에 들리고 싶지도 않도록 만들었다.”

김두한의 회고에서는 “부산은 혼란의 도가니였다. 먼저 내려온 정부 고위층 가족들은 전쟁에 아랑곳없이 환락에 잠겨 있었고 부산 유흥가는 전쟁을 모르는 채 화려한 네온사인에 뒤덮여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나는 부산 앞바다 20리 전방에 수백 쌍의 기동선이 전세를 관망하면서 일본 도피를 꿈꾸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들은 대부분 정부 고위층과 사회 유력인사들의 가족이라고 했다. 100리 전방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데 민족의 자유를 수호하는 전쟁에 아랑곳없이 보화를 싣고 자식들만 데리고 일본으로 피난 가려는 가증한 반민족 모리배를 용서할 수 없었다. 그들에게서 출전 자금을 뜯어내려고 결심한 나는 이른 새벽에 발동선 한 대를 강제로 징발했다. 기관총 1정을 싣고 특공대원에게 권총을 휴대시킨 후 내가 선두에 서서 부산 앞바다 20리 지점에 정박하고 있는 그들의 배에 올라타 금품을 강제로 희사 받았다.당시 그들의 선실을 뒤졌을 때 나는 그들의 화려함에 놀란 정도가 아니라 기절할 뻔했다. 군대에 가야 할 적령기에 있는 젊은이가 여인들과 춤을 추고 있었고, 외래품으로 몸을 감은 그들은 양주병을 앞에 놓고 엔조이에 한창이었다.”

김두한은 다음에는 쌍권총으로 무장하고 광복동에 있는 늘봄댄스홀로 갔다고 한다.“댄스홀 앞에는 고급 세단과 군 고급장교 지프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나는 늘봄 댄스홀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양손에 권총을 들고 16발을 공중에 발사했다. 쌍쌍이 춤을 추던 남녀가 한꺼번에 땅에 엎드렸다. 불과 100여리 전방에서는 전투가 치열해 젊은 청년들이 쓰러져가고 있는데, 전쟁에 아랑곳하지 않는 특권층들은 여자들과 함께 일대 육체의 향연을 베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반민족분자들을 나는 치고 때리고 했다. ‘너희들이 가진 금품을 이 광주리에 담아라. 나는 단순한 금품강도가 아니다. 포항 작전에 의용군으로 참여했다 부상당해 돌아온 500명의 학도병 치료비로 쓸 것이다. 또다시 국가와 민족을 망각하고 춤을 추러 다니는 년놈은 부산 앞바다에 수장시켜 버릴 테니 알아서 하라.’

강문봉의 회고에서는 “낙동강 방어선이 형성되면서 육군본부에서는 김익렬 대령에게 헌병 1개 소대를 주어 부산항만 일대 선박에 대해 수색토록 했다. 유명 정치인과 고위 장성까지 붙들려 왔는데 이들은 도망갈 준비를 하고 배에 탄 채 염탐하고 있었으며 그 중에는 중령급 이상 8명이 체포됐다.”[29] 이승만 또한 일본 야마구치 현에 망명정부를 구상했다고 한다.[30]

정치활동 편집

파일:대한민국 제3대 민의원 당선후.JPG

김두한은 1954년 5월 10일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 종로구 을구 4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한근조, 여운홍 등 경쟁후보들을 제치고 당선되었다. 그러나, 자유당에서 이승만 종신제를 위해 무소속 의원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김두한은 이승만 정부를 비판한 혐의로 선거법 위반과 김관철 살해미수라는 공작 등으로 구속되었는데, 자유당 입당 조건으로 석방되었다. 자유당 의원총회에서 이승만 종신제 추진 핵심인물에 한명이었던 장경근을 구타하기도 했으며[31] 이승만 3선 개헌한 때는 비밀투표 당일 날 김두한은 특무대에 감금당해 참석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개헌한은 국회에서 1954년 11월 27일 비밀투표를 한 결과, 재적의원 203명, 참석의원 202명 중, 찬성이 135표, 반대가 60표, 기권이 7표로 1표차로 부결되었다. 이후 반 자유당의원들은 탈당하였으며 김두한은 제명되었다. 조병옥 등이 민주당의 입당을 제의했지만 거절하여 무소속으로서 활동하였다. 1956년 7월 27일 조병옥의 제의로 62명의 야당 국회의원들이 거리시위를한 이른바 7.27 데모사건에서 김종원 치안국장이 지휘하에 거리시위를 진압하는 경찰들과 몸싸움을 벌이기도 하였다.[32][33]

1956년 10월 13일 배재학원 운동장에서 열린 제1차 여야 민의원 친선 야구대회에 참가하기도 했다.[34] 호헌동지회[35] 등 계속해서 이기붕 사퇴권고안[36]을 제출하는 등 이승만 정부의 독재를 비판하였으며 또 이기붕은 과거 부하이면서 총애했던 이정재에게 지시를 해 국회 휴게실에서 권총으로 협박을 한 이른바 이정재 사단의 국회난입사건으로 협박[37]을 당했으나 이정재를 호통쳤다고 한다.[38] 이 사건으로 여론에서도 시끄러웠으며 야당은 조사단을 결성하여 정치적으로 처리하려고 하는 등 여야간에 공방이 치열했으나 당사자 김두한은 야당의 결성단을 반대하였다.

1956년 10월 5일 이승만을 민족반역자라고 비판하여 국가원수모독죄로 의원징계 받았다.[39] 1957년 5월 25일 자유당이정재 등 정치주먹등의 장충단야당집회방해사건에서 경호 총책임자를 맡았으며 권력에 짓밟히는 모습을 여론에 보이기 위해 김두한은 단원들에게 대처는 하되 소극적으로 대처하라고 지시하였다. 이후 이 사건은 겉으로 보기에는 자유당과 이정재 사단의 목적의 성공으로 보였으나, 권력에 짓밟히는 모습을 본 여론들은 유지광 등 정치주먹의 얼굴이 찍힌 사진 한장 등으로 계속해서 범인들 위치 등을 제보들이 들어오자, 사태가 심각해진것을 우려한 자유당은 유지광을 구속으로 마무리했지만 이 사건으로 자유당과 이정재 등 정치주먹들은 몰락의 시발점으로 언론에서는 깡패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장충단 집회방해사건 이후 김두한은 장경근이익흥 내무장관의 불신임안을 제출하였다.

제4대 국회의원선거에서 제3대 국회 당시에 한국불교태고종, 대한불교조계종 대립에서 비구승을 웅호하여 종로구대처승의 본부를 두고 있던 종교 인사들에게 탄압을 받았으며 또 당시 민주당 바람 등으로 영향 등 낙선하였고, 5대 국회의원 홍성에서 다시 종로에서 6대 국회의원 등 연이어 낙선하였다. 이후 제4대 대통령 선거에서 조병옥 선거운동에 참여하였다.

전국고학생연맹 등으로 고학생들을 지원하는데 인색하지않았으며 신기범, 이찬오 등 학생들과 교류하였다. 4.19혁명 이후 남산이승만 동상을 철거하였다.[40]

제3공화국 편집

5.16군사정변이후 1962년 3월 1일 독립유공자들에게 건국훈장을 수여하였는데 김두한은 부친 김좌진을 대신해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받았다.[41] 이후에 김두한은 5.16에 대해 관망하는 입장이었으나 군의 원대복귀한다는 공약을 믿고 애국단을 조직하였다. 그러나 이 단체는 김형욱김종필의 권력다툼 등으로 해산되었다.

1965년 한일협정 반대 등으로 보궐선거에서 용산구 한국독립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얼마가지 않아 학생들을 선동하여 박정희 정권을 전복하여했다는 국가보안법 위반 및 내란음모 혐의로 구속되었다. 검찰은 김두한 의원이 박후양 등과 함께 정부전복을 위한 5단계혁명계획을 수립하고 학원방위군 배후조종, 폭발물 제작비 지원 활동을 해왔다고 밝혔다.

김두한은 중앙정보부에서 심한 고문을 받는 등 고초를 겪고 있을때, 국회에서는 조윤형의원의 발의하에 김두한 의원 석방결의안이 116표 중 106표로 가결되어 통과되었고 검찰은 이어 공소사실을 반국가단체구성에서 구성예비음모로 변경하였다. 이후 5월 10일 김두한을 비롯해 관련자 전원이 무죄로 석방되었다.[42]

이후 김두한은 잠시 신문로에 한 빈민촌에 안착하기도 했으며 국회건설분과위원회 소속이었기도 하였으며 용산에서 이재민이 발생했을 때 서울시장과 만나 봉천동에 터를 마련해서 생계를 이주시키게 하였고 판잣집철거문제와 갈등이 발생할 때마다 앞장서기도 하였다.


국회 오물 투척 사건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국회 오물투척사건입니다.
파일:오물투척 모습.JPG

1966년 9월 22일 한국 비료주식회사사카린밀수한 일로 국회에서 대정부 질문 중 김두한이 국회발언대에서 발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병철밀수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정부가 범죄를 저지를 만한 환경을 조성해 줬기 때문이다 민족주의를 파괴하고 재벌과 유착하는 부정한 역사를 되풀이하는 현 정권을 응징하고자 한다. 국민의 재산을 도둑질하고 이를 합리화시키는 당신들은 총리나 내각이 아니고 범죄 피고인에 불과하다. 그러니 우선 너희들이 밀수한 사카린 맛을 봐라.
 
— 국회회의록 中[43]

라고 비판하며 정일권(丁一權) 국무총리장기영(張基榮) 부총리 등 국무위원들에게 미리 준비한 인분을 투척하였다.

이후 이병철 한국비료 사장(삼성 그룹 회장)은 사카린 밀수사건과 관련 한국비료를 국가에 헌납하고 언론 및 학원 사업에서 손을 뗄 것을 선언하였다. 그후 이병철 사장은 헌납 교섭을 맡았던 장기영 부총리가 해임되자 개각 1주일 만인 1967년 10월 11일 한국비료 주식의 51%를 국가에 헌납했다.

말년 편집

국회 오물 투척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다 병보석으로 석방된 김두한은 대한민국 제7대 국회 선거 때 경기도 수원에서 신민당 후보로 출마하였는데, 유세도중 북조선의 전깃불 발언이 북조선 찬양했다는 혐의로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서대문 형무소 교도관 서윤환는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된 "그날 저녁 김두한씨가 비에 젖은 채 감방에 왔는데 손과 발에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온몸이 피멍 투성이였다"고 회고했다. 그 다음날 남산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심한 고문을 당했지만 돌아와서는 "서동지, 나 죽을 뻔했어"라며 웃을 뿐 불만은 토로하지 않았다고 한다.[44] 이후 석방된 김두한은 유신벽보를 뜯는 등 계속해서 박정희 정권의 독재를 비판하였고 중앙정보부으로부터 주로 뒤통수 테러를 여러차례 당했다고 한다.[45]

죽음 편집

1972년 11월 19일 사람을 만나러 나갔다가 쓰러져 11월 21일에 사망하였다.[46] 장례는 조시원이 장례위원장으로 사회장으로 치렀다.[47][48]

약력 편집

  • 서울교동공립보통학교 (교동초등학교) 1학년
  • 전국학생연맹고문
  • 대한학도의용군참모장
  • 대한노동조합연합회최고위원
  • 대한부흥건설단장
  • 국민엽합전선의장
  • 불교양로원부원장
  • 대한권투총연맹이사
  • 전국고학생총연맹위원장

평가 편집

굿피플 101인 정치·경제·연예·체육·문화계 (고인,현역)에서 정치계 중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다.[49][50][51]

전 통일부총리 권오기는 그는 조악하고 거칠기는 했지만 결코 야비하지는 않았다고 하면서 인간 김두한은 시원시원한 말투와 예의를 지닌 호감이 가는 사람이었다고 말하였다.[52]

바른 사회 밝은 정치 시민연합(상임대표 전득주 숭실대교수)에서 조사한 역대 가장 훌륭한 국회의원으로는 신익희, 조병옥, 제정구, 김두한 의원이 선정되었다.[53]

시인 김종문은 '이제 한국전쟁 30주년을 맞으며 이미 고인이 되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몹시 그리워지는 두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문학평론가 임긍재, 또 한 사람은 전 국회의원 김두한 씨이다. 이 두 사람은 비록 활동분야는 달랐지만, 애국 의협 결단의 기질에 있어 공통점을 갖고 있었고 나는 지금껏 우리 사회에서 그런 인물들을 거의 만나지 못했다.'라고 말하였다.[54]

변사 김선동평양의 한 극장에서 김두한을 만났는데, "변사를 하러 왔다"는 내 말을 듣고 "열심히 해라."라며 김두한이 사준 따뜻한 우동의 맛을 나는 아직도 잊을 수 없다고 회고하였다.[55]

김영삼은 "의송의 손은 조그맣고 예뻤다."라며 "그 주먹으로 주먹 왕 됐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라며 "발도 작았다"며"의송은 호탕했고, 의협심이 강했던 인물이었기의 매력을 느꼈다."고 말했다.[56]

거스 히딩크 감독은 그가 한국의 독립에 일생을 바친 백야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고 부친이 암살되는 바람에 고아로 자랐으나 정의의 주먹으로 뒷골목까지 제패한 역사적인 협객이었으며 나중에 국회의원까지 됐다는 얘기를 듣고는 "같은 남자로서 무척 매력적인 캐릭터"라고 인물평을 말했다.[57]

협객 김두한 씨도 우리 집의 단골손님이었습니다. 이경주가 조부 이두용과 부친 이해주에게서 전해 들은 이야기로 일제강점기 종로 일대의 한국상인들을 일본 주먹으로부터 보호해준 김두한의 옷에 얽힌 일화는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다. 김두한은 특히 고학생들에게 자상했다. 그들이 찾아오면 “전당포에서 돈과 바꿔 쓰라”며 입고 있던 양복을 선뜻 벗어주었다고 한다.[58]

배우 윤일봉은 "서울 명동의 '나일구' 다방은 당시 영화인들의 만남의 장소였는데 회합 때마다 김두한 의원이 나와 위로와 격려를 해줬다."라며 "영화인의 고충과 자부심을 이해하는 정신적 후원자였기 때문에 당시 스타들 모두가 김 의원을 존경하고 따랐다."라고 회고했다.[59]

김동길한국 전쟁 당시 문자 그대로 기골이 장대한 사나이였다. 고 회고했다.[60]

김웅수 장군은 회고록에서 한강 방어선에서의 기억이다. 30일경 김두한 씨의 내방을 받았다. 자기 동료 들게 총기를 주어 일선 배치를 요구하여 그의 애국심에 감탄하였다. 고 회고하였다.[61]

범진 스님은 “암울한 시대를 살면서 의로운 일만을 했던 김두한의 재는 의미가 높습니다.” 천도재를 주관한 범진 스님은 “여법한 천도를 했으니 이제 김두한을 재조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스님은 또 “김두한이 말년에 부처님에 귀의하고 도선사에 있던 청담스님의 제자가 된 것 등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다.”라고 말했다.[62]

타카피 (TACOPY)의 ‘김두한에 작사를 쓴 보컬 김재국은 “비록 야인이긴 하지만 모두가 주눅이 들어 있던 일본 강점기에 배짱 좋게 민족을 이야기했던 그의 의협심을 노래로 되살려보기로”했다고 한다.[63]

1972년 11월 21일 서울 성북구 정릉동 김두한의 빈소를 찾은 의정부 성신 보육원 황금일 원장은 고인의 검약 상에 깜짝 놀랐다. 대지 20평 남짓한 초라한 주택도 그렇거니와, 가구며 세간살이 어느 것 하나 백야 김좌진 (金佐鎭) 장군의 아들이며 2선 국회의원 출신의 유명인사답지 않게 초라했던 것이다. 독립 유공자 연금증서를 통째로 보육원에 맡겨 운영비에 보태 쓰도록 한 처사로 보면 여유 있는 살림인 줄 알았는데, 생각과는 너무 달랐다고 한다.[64]

종로 2가에 있던 화신백화점 4층 화신 이발관에서 근무했던 이발사 이상희는 “범접할 수 없는 무게와 당당함을 갖춘 분이었지. 요즘의 깡패들과는 차원이 달랐어.” 고 말하며 “머리가 비상하고 기억력이 좋았으며 특히 말을 잘했다.”며 김두한은 평소에는 과묵하다 싶을 정도로 말을 아꼈지만 한 번 입을 열었다 하면 한두 시간 정도는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갈 정도의 능변이었다는 것, 또 늘 신문 잡지 등 읽을 것을 손에서 떼어놓는 법이 없었다. 며 “교동국민학교 2학년 중퇴의 학력이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학구적인 모습에 매우 놀랐다.”고 회고하였다. 또, 이상희는 야인시대를 보며 실제와 드라마가 똑같다고 느낀 점은 시장 상인들이 김두한을 대하는 태도. 김두한은 상인들로부터의 존경과 지지가 대단했으며, 종로 거리를 걸을 때는 마주치는 거의 모든 사람이 공손하게 인사를 건넸다. 고 한다.[65]

4.19 혁명 당시 학생운동가이자 대한민국 제6대 국회 당시 비서를 지냈던 강릉대 교수 서용화은 "전국을 호령한 주먹 왕이었던 만큼 무서운 사람일 것이라는 일반적 이미지와는 다르게 항상 경어를 쓰는 등 품격을 갖춘데다 의협심이 강해 바른길을 가려고 부단히 노력한 정치인이었습니다.” 김두한 의원에 대해 "주먹계 시절과는 달리 정치계에선 조직 없이 독불장군이었지만 올바른 길이라고 판단되면 카리스마와 정의감으로 대단한 영향력을 발휘했다.”고 말했다. 또 김두한 의원이 당시 대통령 경호 실장을 지냈던 차지철 국회의원과 국회 본회의장 안에서 갑자기 "당신 힘이 장사라며 나하고 한 번 붙어볼까?”라며 웃통을 벗어 던지는 '깜짝쇼’를 벌이는 등 호걸다운 면모도 보여줬다고 일화를 소개했다. 서용화 교수는 "김두한 의원은 생전에 해방 직후 대한민청으로 우익활동을 한 것은 아버지 김좌진 장군이 공산당으로부터 암살당했다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심정을 토로한 적이 있다.”고 밝혔다. 서용화 교수는 "김두한 의원이 과도한 반공 활동으로 일반에 다소 부정적 이미지가 형성된 것은 사실이지만 일제강점기 주먹의 힘으로 민족적·의협적인 행동을 한 것과 해방 후 노동운동과 함께 정파에 휘둘리지 않고 정의감에 기반을 둔 정치활동을 한 부분은 높게 평가돼야 한다.”라고 말했다.[66]

이만섭은 "바른 소리 하는 사람들이 오래 살아야 돼 김두한 의원은 너무 일찍 돌아가셨어요."라며 죽음을 안타까워했다.[67]

서대문 형무소 교도관 서윤환은 김두한과 관련한 정보도 몰래 빼내 가족들에게 전해주었다. 당시 중앙정보부와 경찰의 시퍼런 눈이 항상 그 주변을 감시하고 있었다. 만약 적발되면 구속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분의 민족주의 사상과 사나이다움에 반해 죽을 각오를 하고 정보를 건넸다."라고 한다.[68]

곽태영백범 김구를 암살한 안두희를 찔려 살해미수혐의로 양구경찰서에 수용돼 갇혀 있을 때 노인네들이 찾아와 "젊은이가 민족의 원수를 갚았으니 이제 편히 눈을 감겠다."라고 할 때나 김두한 씨가 면회와 5만 원의 영치금을 놓고 갈 때는 심장이 펄펄 뛰는 감격을 느꼈다."라고 회고하였다.[69]

고바우 영감국회오물투척사건을 적군 일개 대대를 섬멸할 수 있는 것보다 더한 위력이라고 평가했다.[70]

잘못 알려진 것 편집

틀:정리 필요 문단 SBS 드라마 야인시대의 인기로 구마적, 신마적, 최동열, 마루오카, 김영태, 박인애 등 실재인물 사진이라며 인터넷에 떠돌아다니기도 하였는데, 잘못 알려진 내용은 다음과 같다.[71]

박헌영 사진으로 최동열 기자라고 하나 최동열은 극 중 인물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가상 인물인 최동열 기자(정동환)의 눈을 통해 근·현대사를 조망한다는 설정한 극 중 내레이션 같은 캐릭터다.[72] 또 다른 정신적 지주라며 유진산이라는 또한 사실이 아니다. 김두한의 정신적 지주는 심의 적으로 부친 김좌진이다. 마루오카라는 인물사진은 한호산이며 첫사랑이라는 인물사진은 본처 이재희이며 구마적이라는 인물사진은 이원조.[73]이며 박정희과 찍은 사진을 권력과 손잡았다는 사진은 1962년 3월 1일 건국훈장 수여 뒤에 박정희을 비롯한 여러 인물 들와 기념사진이며[74] 부인과 함께 찍었다는 김영태의 사진은 1944년 부인과 함께 찍은 최배달이다.[75]

역사문제연구소는 인물로 보는 친일파 역사(역비의책 15) 이란 책에서 아래와 같이 밝혔다.

(전략) 요즘 우리 역사에서 잘못 알려져 있는 것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제가 일제시대 때 신문을 뒤적이다가 조선일보에서 보았는데 날짜는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겠습니다만, 김두한 때문에 종로시장이 철시(撤市)한 기사가 나옵니다. (중략) 김구 선생이라면 우익 민족주의자였죠. 일제 치하 전체를 반공투쟁으로 일관했던 분인데요, 그렇게 반공투쟁에 철저했던 분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김구 선생을 좌익으로 몰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김구 선생이 민족주의자가 아닌 것은 아닙니다. 그런 김구 선생이 김두한을 불러서 호부에 견자라고 노골적으로 충고하는 것이 백범어록에 나와있습니다. 이렇게 호랑이 아버지에 개새끼라고 비판받았던 김두한은 미군정하에서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래서 오키나와 감옥에서 갇혀 있었는데 미군정에서 집행하지 않고 이 핑계 저 핑계로 이승만 정권으로 넘겼고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고 난 뒤 그를 사면해서 데려왔습니다. (후략)"[76]


한국 100년 우리는 이렇게 살았다 - 깡패와 건달로 본 100년에서는 우미관말고는 별다른 직장없었던 부하들은 시골에서 갓 올라온 시민이나 등 돈을 갈취했다며 내레이션으로 말하며 당시 자료라며 말하지만 정작 엉뚱한 내레이션과 자료화면이 정 반대적으로 방송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그런 기사는 없으며 사실이 아니다. 종로구에서 3대 걸쳐 가장 오랫동안 양복집을 운영한 이경주는 "김두한 씨도 우리 가게 단골이었지요. 다른 곳 불량배나 일본 주먹패로부터 종로의 한국 상인들을 보호했다고 들었어요. 20여년간 우리 가게에서 양복을 해 입었다고 하더군요.”길을 가다가 추위에 떠는 사람을 보거나 돈이 궁해 사무실을 찾은 사람들에게 양복, 외투 등을 선뜻 벗어주곤 했다는 것은 김두한의 유명한 일화. 한인 고학생들이 학비를 부탁하러 찾아오면 “전당포에서 돈과 바꾸어 써라”며 입은 옷을 바로 벗어주었다. 때문에 그는 평생 늘 두 벌의 양복을 번갈아 가며 입었다고 한다. 종로구에서 이발사를 운영한 이상희는 야인시대를 보며 실제와 드라마가 똑같다고 느낀 점은 시장 상인들이 김두한을 대하는 태도. 김두한은 상인들로부터의 존경과 지지가 대단했으며, 종로 거리를 걸을 때는 마주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공손하게 인사를 건넸다고 한다.[77][78][79]

백범어록은 물론 백범일지에도 그런 내용은 없으며 백범일지에 변절한 안중근의 차남 안준생에 대해 “민족 반역자로 변절한 안준생을 체포해 교수형에 처하라고 중국 관헌에게 부탁했으나 그들이 실행치 않았다.”(‘백범일지’ 619항/ 너머북스 펴냄) 라는 내용이 있다.[80] 안중근 의거 100주년(2009년)을 맞아 국내 학계, 언론이 다각도로 재조명했지만 안준생의 친일행적은 다뤄지지 않았다. 다만 ‘연합뉴스’가 ‘안중근 의거 100년 살아남은 자의 슬픔’(2009년 11월 1일자)이라는 제목으로 “안준생의 친일행적은 적어도 학계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이지만, 국내 어느 연구자도 이런 사실을 지적하지 않는다. 그만큼 안 의사가 갖는 영웅성이 절대적이기 때문일 것”이라고 분석한 바 있다.[81] 실제로 안준생의 관련은 이토 히로부미 안중근을 쏘다란 책이 출판된 2009년 9월과 10월 그리고 본격적 출판이 된 11월 때 진보 보수 언론에서 기사화하였다.[82]

김춘삼은 자신의 자서전 나는 왕이로소이다에서 "이후 춘삼은 남대문 일대를 점령하며, 김두한을 만나 동생으로 삼고 함께 일인의 악행에 맞서 정의를 행하게 된다."[83]라고 하는 등 하지만, 김춘삼은 1928년생으로 무려 10살 차이이며 스쳐 지나간 인연도 아닌 전혀 남남이다. 실제로 드라마 왕초 (드라마))가 끝나고 조세형의 기사[84] 딱 하나의 기사만 기사화하였다. 김춘삼은 한국전쟁이 나자 입대하여 부상을 당하여 국가유공자로 지정되었다고 한다.[85] 그러나 대한민국 국방부에서는 김춘삼에 대해 자료는 없으며 김춘삼이라는 동명이인 몇명에 자료만 있다고 한다. 하지만 동명이인 자료는 포로관련 자료이다.[86] 또한 드라마 왕초 (드라마))에서 어린 김춘삼이 누이와 강원도에서 대구로 가다 사냥꾼의해 누이는 절벽에서 떨어져 잃고 사냥꾼에게 잡혀 짐승몰이로 호랑이(특성상 그래픽으로 호랑이 처리)를 잡는 장면은 1930년후반에는 조선조정과 일제의 사냥으로 1933년부터 1942년까지 잡힌 호랑이는 8마리, 표범은 103마리였다. 그러나 1933년부터 호랑이가 붙잡힌 곳은 모두 함경북도 등 북한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흥미로운 건, 남한에서의 호랑이 피해는 계속됐다는 것이다. 1936년 경북과 충북에서, 1942년엔 경남에서 호랑이에 물려 죽은 사람이 보고돼, 이때까지도 남부지방에 호랑이가 살아있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하나, 강원지역이 아닌 충북,경북,경남의 이야기이다.[87]

김용옥은 1991년 자신의 책 도올세설에서

내가 김두한에 관해 출간된 모든 정보를 대강 훌터 보고 난후에 내린 하드팩트(hardfacf) (원래는 hard facts이다.)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그는 개성에서 자라난 부모를 모르는 고아다. 열살 때 서울로 내려와서 거지노릇을 하다가 왕초라는 거지 대장에게 불들리어 장차구 다리(청계천) 밑 거지 소굴에서 컸다. 그런데 김두한은 선천적으로 재능을 부여받은 탁월한 쌈꾼이었다. 그 쌈질이란 무슨 일본인의 무술을 배운 것도 아니고 조선 전통의 무술을 배운 것도 아닌 순 경험적 체득의 기술인데, 김두한이 주먹질보다는 다리질에 탁월했다는 것은 그의 쌈질이 조선 전통의 태껸과 무의식적인 연속성을 진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는 움직였다하면 사람의 키만큼 붕 떠서 발길로 상대방의 아구를 질러버린다. 다시 말해서 그가 장차구 다리 밑의 거지에서 종로 일대를 제패하는 깡패두목이 되기까지의 과정은 그가 김좌진의 아들이라는 픽션과는 전혀 무관한 사태이며, 김두한 자신에게도 의식된 족보의 사실일수가 없으며, 오로지 쌈꾼의 실력, 그야말로 적나라한 실력하나로 주먹계의 패자가 된 인물이었다.[88]



김을동 의원 비서실에 의하면 김용옥은 후에 김을동의원에게 자신의 허위사실 공표를 인정하고 공식적인 사과를 했다고 한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김을동의원실  2009/08/04</br>  

</br></br> 우선, 이렇게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드립니다.</br> </br></br> 하지만, 이같은 주장은 모두 사실이 아닌, 잘못된 정보임을 공식적으로 분명히 말씀드립니다.</br> </br></br> 참고로 지금 김을동의원실 차원에서 법적 소송을 준비 중입니다.</br> </br></br> 그동안 위와 같은 주장을 하면서, 김좌진장군과 김두한의원, 그리고 김을동의원까지 인격을 모독하고 명예를 훼손한 일들이 많았음에도 김을동의원께서 일일이 대응하지 않은 이유는 대꾸할 가치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br> </br></br> 이같은 주장을 했던 사람 중에 한 분인 도올 김용옥선생도 후에 김을동의원께 자신의 허위사실 공표를 인정하고 공식적인 사과를 했음을 분명히 말씀드립니다.</br> </br></br>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 있는 김을동의원실에 오시면 김좌진장군의 모친을 비롯하여 장군의 부인 오숙근여사, 김두한의원의 부인 이재희여사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 김을동의원 이렇게 4대가 오붓하게 처마 밑 마루에 앉아 오붓하게 함께 찍은 오래된 흑백사진을 보실 수 있습니다.</br> </br></br> 이 사진 한장만으로도 위의 주장은 모두 거짓된 것임을 아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br> </br></br> 궁금하시면 언제든 의원실로 찾아 오십시오.</br> </br></br> 4대에 걸친 가족사는 100년이 넘는 긴 세월입니다. 제3자가 사실관계를 확인하지도 않고 단지 추론과 정황만으로 대한민국의 위인과 그 자손들을 욕되게 하면 안될 것입니다.</br> </br></br> 어찌보면, 인터넷의 또다른 폐해일지도 모르겠네요. 소위 '카더라~'통신 말입니다.</br> </br></br> 궁금해 하신 선생님의 궁금증을 푸는데 도움이 되셨으면 합니다. 더 궁금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의원실로 연락주십시오.</br> </br></br> 감사합니다.</br>[89]


백기완백기완의 통일이야기란 책에서


거리에서 이겨내던 급성폐렴</br> 급성폐렴에 걸려 다 죽게 된 나는 마지막으로 이왕에 죽을 바엔 북쪽으로 가는 기차라도 한 번 얻어 타고 가다가 죽어도 죽자 하고 북쪽으로 가는 기찻질 염천교 다리 밑 으슥한 곳에 쭈그렸습니다. '북쪽으로 가는 기차만 올 것이면 무턱대고 타고 보리라, 암.'</br> 그런데 기다리는 기차는 아니 오고 난데없이 덩메가 집채기만 한 두 사람이 마주 서는 것이 보였습니다.</br> </br></br> 그러더니 서로 주먹을 쥐며 으르는 꼴이 맞짱이 붙는가 보았습니다.</br> "야 이 새끼야, 지금 북쪽으로는 못 가게 되어 있지 않아. 또 너는 서울역전에서 짐을 져먹고 사는 가대기(어깨에 짐을 지는 짐꾼)구. 그래서 북쪽으로 뻗은 철로를 떼다가 좋은 일에 쓰자는데 왜 못하겠다는 거야. 돈만 받으면 될 거 아니야."</br> "이봐, 네놈이 아무리 깡패 우두머리라고 하더라도 그래 눈물도 콧물도 없어? 지금 당장 북쪽으로는 못 간다고 해서 철로를 떼다가 팔아먹으면 어떻게 되는 거야. 우리가 우리 다리를 자르는 거 아니야. 그것도 장사라고 해먹겠단 말이야?"</br> "야 이 새끼, 이거 말따구 보라. 다시 북쪽으로 가자고 한다면 그것 빨갱이야 이새끼야. 그러니까 선택하라고. 너 오늘 내 손에 죽을래, 아니면 내가 시키는 대로 할래."</br> "너 이 새끼, 그래도 깡패인 줄 알았더니 양아치였구나." </br></br> 이때다, 번개처럼 뱃길이 올라오는가 싶은데 슬쩍 비키면서 무릎치기로 엥기고 이어서 몸통째 번쩍 하늘 높이 들더니만 뱅글뱅글 돌리다가 철길 위에대 태맹이를 치려고 할 때였습니다.</br> "그만, 그만, 내가 졌어, 그만." 그런 소리가 났습니다. 그러자 진짜 태맹이를 치는 듯 하다가 내려 놓고서는 웅쿠르는 것이었습니다.</br> "네놈의 뼈다귀를 추리려다가 그만둔 까닭을 알아? 네놈도 주먹으로 먹고 사는 놈, 차라리 아주 죽여야지, 나간이(병신)를 만들 수가 없어서 내려놓는 거야 이 새끼야. 그러니까 꿇어, 꿇고서 형님그래, 그러면 목숨은 살려줘. 안 꿇어?"</br> </br></br> 아니나 다를까. 그렇게도 떵떵거리던 놈이 무릎을 꿇고 "가대기 형님, 이제부터 참말로 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 하고 큰절까지 하는 것을 본 나는 급성폐렴이고 나발이고를 잊은 채 벌떡 일어나며 혼자서 울부짖었습니다.</br> "그렇다, 나도 이다음 커서 저 가대기처럼 견줄 놈 없는 힘꾼이 되자.'하고 그 가대기의 뒤를 쫄쫄 따라갔는데 뜻밖에도 그 가대기가 나를 알아 보는 것이었습니다.</br> 언젠가 나와 우리 아버지가 서울역, 그 너른 마당에서 "야 아바이, 야 기완아." 그렇게 서로 부르면서 달려와 꽈당 하고 껴안더니만 땅바닥에서 데굴데굴 구르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그것이 그렇게도 멋졌다는 것입니다.</br> </br></br> 갈라짐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시던 아, 가대기 형</br> 어쨌거나 나의 급성폐렴을 말끔히 씻어준 그 싸움에서 가대기 형의 한 방에 떨어지던 그 덩메는 누구였을까요.</br> 그때 종로바닥을 뒤흔들던 김두한이었습니다. 이와 맞싸운 가대기는 누구고. 가대기는 말 그대로 서울역 둘레에서 어깨에다 짐이나 져먹고 사는 이름없는 노동자고. 그런 그들이 왜 싸움을 했느냐.</br>
그때 삼팔선이 생기면서 북쪽으로는 기차가 못 가게 되자 김두한 패거리들이 뚱속(욕심)을 부렸던가 보았습니다. 북쪽으로 뻗은 철로를 떼다 용수철공장에 팔아먹으면 철이 없이 용수철을 못 만들던 우리나라에서 돈을 많이 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철로에 마주해 좀 알고 또 힘도 쎈 가대기를 앞세워 철로를 뜯어오게 하려고 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할 수가 없다는 가대기와 김두한의 뚱속이 맞짱을 불렀던 것이지요.</br> </br></br> 가대기형은 이와 같이 싸움도 잘 했건만 그 일이 있은 뒤에 어떤 뒷골목 싸움에 낑기는 것을 나는 한 번도 보질 못했습니다. 나는 그 바자(?)가 영 알 수가 없어서 이따금 찾아가 묻곤 했습니다.</br> "형, 오늘은 또 한판 안 붙어?" 하고. 그럴라 치면 빙그레 웃으시면서 순대국도 사주고, 뻔데기도 사주는 마음씨 좋은 형님이기도 했지만 배울 것도 많은 분이었습니다.</br> </br></br> 언젠가 내 바램이 앞으로 축구선수가 되는 것이라고 하자 빙그레 웃으면서 하시는 말씀이었습니다.</br> "기완아, 축구는 둥근 공을 차는 것이니 우선 재미있는 운동이지? 하지만 그것만 해가지고는 기완이가 그렇게도 그리운 기완이 고향을 갈 수가 있는 통일은 못 한다."는 것이었습니다.</br> 지금 우리가 이렇게 갈라지게 된 것은 삼팔선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돈 많은 사람들이 돈을 더 벌고저 해서 사람과 사람을 갈라놓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사람을 돈벌이로만 다루려고 하기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김두한이도 그 한 보기가 된다는 것이지요. "두 동강이 난 땅덩어리에 놓인 철로를 떼다 팔아먹겠다는 것은 나라가 갈라져 피눈물을 흘리든 말든 제 배만 부르겠다는 것이요, 그것을 통일을 하고저 하는 사람들과 갈라지게 되는 것이다. 세상이 이렇고 보면 기완아 참말로 네가 차버려야 할 것은 무엇이겠느냐. 둥근 공이냐, 아니면 이 잘못된 세상이냐, 두고두고 생각해 보거라." 하시던 아, 가대기 형님.</br> </br></br> 그 가대기 형을 기리고저<<단돈 만 원>>이라는 영화극본을 쓰다</br> 하지만 참말로 세상은 얄궂은가 봅니다. 그런 가대기 형과 헤어지게 되는 날이 오고야 말았습니다.</br> 가대기 형과 만나곤 하던 그 무렵 나는 난민수용소에서 살구라는 애와 그렇게 가찹게 지낼 수가 없었습니다. '헤어지면 그리웁고 만나보면 시들하고'라는 노랫말처럼 이 살구라는 애는 정이 그리 많았습니다. 하지만 또 한켠으로 남을 업신여기는 못된 버릇도 있었습니다.</br> </br></br> 수용소에서 있게 되면 누구나가 다 이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그 이가 모두 나한테서 나왔다고 하도 구박을 하는 통에 참을 수 없어진 어느날, 남산 꼭대기에 가서 한판 붙게 되었습니다.</br> 하지만 살구는 서울 애, 나는 촌놈. 그러니 택이나 있겠어요. 내가 처음엔 실컷 주어맞았습니다. 그러다가 얼결에 촌놈 씨름 솜씨로 번쩍 들었다 엎고선 디리 갈겨 내가 이길 만했을 적입니다.</br> 누가 툭툭 쳐 돌아다보니 아이고머니나, 내가 그렇게도 좋아하는 가대기 형이 아니겠어요. 그래서 나는 대뜸 "형, 오늘은 내가 이겼지." 그랬을 때입니다.</br> </br></br> 고개를 절레절레 젖더니만 하는 말씀이었습니다.</br> "이봐, 싸움은 나쁜 놈, 가진 놈들하고 해야 이기고 지는 것이 있는 법이야. 가진 것이라곤 이밖에 없는 놈들끼리 백날 붙어보면 뭘해, 서로 죽는 거야 이놈들아, 알겠어?"</br> 그러시는 게 아닌가 말입니다. 나는 그 말이 그렇게 서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뒤로부터는 서울역 둘레엔 아예 가질 않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얼마 있다가 가대기 형이 철도파업 때문에 깡패들한테 끌려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달려가 알아보니 알만한 사람들은 쉬쉬하고 양아치들은 그 자식 그거 빨갱이 새끼 벌써 골로 갔을 거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말입니다.</br>
이때 나는 그 가대기 형을 꼭 내가 죽인 것만 같아 가대기 형과 김두한이가 싸우던 북으로 가는 철로를 바라보며 날마다 울고 또 울었습니다.</br> 가대기 형은 다른 것은 몰라도 나와 똑같은 바램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형도 단돈 만 원, 나도 단돈 만 원이 있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br> 가대기 형이 만원이 필요한 까닭은 형의 홀어머니를 병원에 모시자는 것이었고 나는 그 돈으로 중학교에 입학하자는 것이었고. 그런데 가대기형은 그 돈을 만들 수가 없었습니다. 김두한이와 손을 잡고 북으로 뻗은 철로를 떼 오기만 하면 만 원이 아니라 수십만 원도 생길 수가 있는데 그 검은손을 뿌리쳐 깨트리는 곧은 삶을 사시다가 도리어 어디론가 끌려가 지금껏 아니 돌아오는 아 가대기 형, 그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계실까.</br> </br></br> 어디에 계신든 그 형은 나에게 맨 처음 이 세상의 갈라짐, 다시 말해 분열이란 무엇이며, 또 통일이란 무엇인가를 생각케 한 스승이십니다.</br> 그래서 내가 죽기 전에 그의 뜻을 기리느라 나는 지난 1994년 <<단돈 만원>>이라는 영화 만드는 책(극본)을 썼던 것입니다.</br> 모든 이들에게 우리들의 갈라짐, 분단이란 무엇인가를 가르치고 아울러 진짜 통일이란 무엇인가를 가르치려고. 하지만 그것은 아직도 영화로 되진 못하고 내 책꽂이에서 상기도 곰슬고 있습니다. 이따금 가대기 형의 부라린 눈빛이 어리는 낡은 책꽂이에서.</br> [90]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6대 국회의원 당시 나이가 48세이었는데, 차지철은 1932년생인 백기완보다 2살 아래인 1934년 생이며 검도, 태권도 등 합이 10단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박정희의 비호 아래 반대되는 정치인들 구타를 하는 등 무소불위의 권력이었던 차지철[91]조차 함부로 하지 못했고, 역대 가장 악명높다고 평가되는 김형욱, 이후락가 중앙정보부장이었던 중앙정보부조차 주로 뒤통수 테러를 가했는데, 한창나이인 20~30대에 가대기라는 정체불명과 일화가 있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이는 흔히 3대 구라로 알려진 백기완,황석영, 방동규 중 방동규와 일화[92]에 단장취의 또는 창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2003년 3월 21일, 민언련은 2003년 2월 이달의 좋은 방송·나쁜 방송 통해 드라마 야인시대의 대해 공표하였는데,[93][94] 그러나 사실 (fact)와 관계없이 이해관계적으로 공표하였다.

일제 강점기시대에는 박춘금이며[95][96], 해방 후에는 체계적으로 조직화한 이정재, 임화수이다.[97]

해방공간에서 우익활동은 진보세력에서 주장하는 무궁한 양민, 즉 제삼자관계라고 주장하지만, 제삼자와 관계와는 연관없으며 심영의 피습으로 백병원에서 다시 만나 심영을 살려주기도 하였다.

김성수의 친일설은 반민특위이승만 정부의해 해산 전때 처벌판결받지 않았으며, 또 당시 일제 패망직전 시기에는 여운형, 조만식 등 인물들은 이름 도용당하기도하였는데, 이는 보수언론인 조중동이 주장하는 여운형 친일설과 같은 이치이다.

드라마 상에서 "빨갱이"로 불렸다고 "좌파 세력을 악의 축"이라고 주장하나, 극 중에서 악의 축이라고 하지 않았으며 또 실제 좌, 우익 대립에서 서로 빨갱이, 반동으로 불렸다.

폭력을 미화하지 않았으며 주요 사건을 내레이션으로 설명할 때는 중립적으로 처리했으며 이정재김기홍이 결별할때 모종의 일로 결별했다는 설이 있지만 알수없다는 내용이나 이성순 린치 사건 때는 내레이션으로 이런이런 설이 전해진다거나 설이 있는 내용에 대해서는 따로 내레이션을 통해 관련 소개하기도 했다.

극중에서 여성상을 왜곡하지 않았으며, 실제 김두한에게서 여성에게 인기가 많았으며 여성은 물론 부인과 나이가 어린 사람에게도 경어를 쓰는 등 품격을 갖췄다고 한다. 1부(1~50회)에서 왜곡을 했다며 정작 어느 부분이 왜곡인지 설명이 없다. 2부(51~124)에서는 시청률이 하락했다고 말하고 있지만, 시청률 평균 30%대로 유지되었는데, 이는 역대 드라마 중 낮은 수치의 시청률이 아니다. 용의 눈물은 평균 시청률 27%대를 기록하였으며, 태조 왕건 (드라마)는 평균 30%대 중반의 기록 하였으며 서울 1945는 10%대 기록하였다. 또한, 시라소니와 김두한의 결투장면을 넣으려고 했다고 하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98][99][100]

사후 기타 사건 편집

후계자의 사칭 하며 횡포를 부리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101][102]

가족 편집

4명의 부인에서 4남 2녀의 자녀를 뒀으며 호적상으로는 본처 이재희의 자녀로 입적되었다.

신념 편집

무산대중 (無産大衆)[103]

주석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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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6. 실제로 사람일보에서 기사화 박춘금 기사 이전에는 박춘금에 대해 언급이 없었으며, 1999년 MBC 한국 100년 우리는 이렇게 살았다. 깡패와 건달로본 100년에서는 이성순은 1913년생, 이정재를 1918년생으로 나오는 등 급조로 제작되기도 했다.
  97. 정경훈 논설위원. "(역사 속의 인물)‘정치깡패 1호’ 이정재", 매일신문, 2009년 10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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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1. "(세상만사-나라안) 김두한 후계자 사칭 술값 안내", 문화일보, 2006년 6월 13일.
  102. 박효순기자. "“불우이웃도 돕고, 돈도 버세요” 천사의 탈 쓴 ‘신종 다단계’", 스포츠칸, 2009년 11월 11일.
  103. 연작 에세이 어머니 탤런트 김을동 조강지처 편 KBS

바깥 고리편집

전 임
(종로구 갑)박순천
(종로구 을)오하영
제3대 국회의원(종로구 을)
1954년 5월 31일 - 1958년 5월 30일
무소속
종로구 갑: 윤보선
후 임
(종로구 갑)윤보선
(종로구 을)한근조
전 임
서민호
제6대 국회의원(용산구)
(보궐선거)
1965년 11월 10일 - 1967년 6월 30일
한국독립당
후 임
김원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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